아르누보 시대를 대표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알폰스 무하
체코를 대표하는 애국자,
민족주의자 이기도 한 알폰스 무하
체코 독립에 있어 열성적이었으며,
독립 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우표, 화폐 디자인을 손수 제작하기도 했다.
그의 노래에 대한 재능 때문에
브르노의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무하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사랑했다.
1894년 Théâtre de la Renaissance에서
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알리기 위한 석판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무하의 아름다운 포스터는 큰 호평을 받아 유명해졌다.
그는 이때부터 많은 회화, 포스터, 광고와 책의 삽화를 그리고 보석, 카펫, 벽지등을 제작하게 되는데
이러한 스타일은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이후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의 아르누보 스타일은 많은 사람들이 흉내 내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이런 상업적인 성공에 대해 부담스러워 했으며
보다 고상하고 위엄있는 예술과 고향에 대한 예술적 관심에 집중하고 싶어했다.
1906년 미국에 초대받아 1910년까지
그는 현대적 스타일로 프라하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들이었던 <임페리얼>
그리고 자치의회 건물인 <유럽>의 인테리어 작업을 했다.
1918년 독립된 체코 정부가 형성된 후에 무하는
<관제적 양식>인 체코의 기하학적 양식의 창조에 몰두했다.
그의 재능은 새 정부가 쓸 우표, 은행권, 문서 등을 디자인했다
그의 인생 말엽에 무하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사라졌다.
1930년 체코에서 그의 작품들은 낡은 기능주의 전성시대의 산물인 구식이며
지나치게 민족주의를 강조한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1939년 3월 프라하가 독일에게 점령된 후에 게슈타포는
몇 번이나 고령에 다다른 무하를 검거해서 심문을 가했다.
그 결과 무하는 폐렴을 앓게 되었고 1939년 7월 14일에 사망했다.
"예술가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과 조국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알폰스 무하-
Alphonse Maria Muc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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