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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정보] 프란시스코 고야


    잔혹했던 시대가 낳은

    스페인 천재화가


    화려하고 뛰어난 색감으로
    귀족들의 주목을 받으며
    유명해진 프란시스코 고야

    병으로 청력을 잃고
    프랑스-스페인간의
    반도전쟁을 겪으며
    그의 그림 주제는 완전히
    뒤바뀌게 되는데요
    마녀와 같은 미신이 난무하는
    당시 사회를 풍자한
    판화집<카프리초스>

    전쟁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잔혹함을 기록한
    판화집 <전쟁의 참화>

    그리고 기괴하고 섬뜩한
    <검은그림>연작 등등
    출세를 따라가던
    기회주의적인 화가였지만
    격동적인 시대상황을 겪으며

    당대의 가장 어두운 측면을
    고스란히 그림으로 고발해낸
    스페인의 천재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Goya



  • [작가정보] 김홍도


    조선의 아름다움을 

    그려낸 풍속 화가

    김홍도


    중인으로 전락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홍도는

    어려서부터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며 자라왔고,


    스승인 강세황의 추천으로 도화서의

    화원이 된 그는 궁중화원으로 명성을 올리며

    강세황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1773년, 29세의 젊은 나이인 김홍도는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였던 정조의 초상을 그리게 되는데 

    이는 화원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무렵부터 그는 명나라 문인 화가인 이유방의 

    호를 따와서 단원(檀園)이라 스스로 칭하였는데,

    이유방의 고상하고 맑은 정신을 지닌 그림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후 단원 화풍이라고 불리는 산수화들을 

    그려낸 그는, 과감한 생략을 통해 스스럼없는 

    필묵을 구사하여 산수화의 진면목을 보여주었고,


    말년에 이르러 조선 후기 농민과 수공업자와 같은 

    서민의 생활상을 소재로 큰 관심을 기울이며 

    풍속화를 그려낸 그는,


    1800년, 정조의 승하와 그의 후원자인 

    김한태를 잃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1805년 겨울에 쓴 편지를 마지막으로

    정확한 사망 시기가 알려지지 않은 채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정조의 신임과 뛰어난 화법으로 

    높은 명성을 지닌

    조선의 아름다움을 그려낸 풍속 화가, 

    단원 김홍도.


    "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 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다. 

    삼십 년쯤 전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 "


    - 정조의 어제문집 中 -

    檀園 金弘道



  • [작가정보] 에곤 실레 [1]


    죽음과 성을 표현한

    오스트리아 출신 천재화가

    에곤 실레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툴른에서 태어나

    천부적인 자질로 빈 미술학교에 입학하지만

    보수적인 학풍으로 3년 만에 중퇴하게 된 에곤 실레.

     

    바로 이 시기에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나게 되면서, 

    에곤 실레의 나이 17세, 클림트의 나이 45세에

    둘은 멘티 멘토의 관계를 넘어서 친구를 맺었다고 합니다.


    초기의 그는 클림트를 연상시키는

    아르누보 계열의 장식적인 양식을 선보였지만,

    점차 클림트의 영향에서 벗어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갔고


    클림트와는 대조적으로

    장식적인 측면보다 표현에 더 관심을 두었던 에곤 실레는

    죽음과 에로티시즘이 결합된 충격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작품들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 결과, 육체를 왜곡된 형태로 거칠게 묘사하고

    메마르고 병적인 색을 띠면서, 종종 강한 성적 의미를 지니는

    독자적인 스타일이 나타나게 되었는데요.


    그중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죽음과 여인>  

    금전적인 문제로 중산층 가정의 여성과 결혼하게 되면서,

    4년 동안 사랑했던 ‘발리’와의 이별에서 탄생한 작품으로

    남녀 관계 속 파멸 직전의 괴로움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1918년, 클림트의 사망 이후 

    빈 분리파 전시회에서 인생 최고의 큰 성공하게 거둠으로써

    예술·경제적으로 그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지만

    같은 해 10월, 스페인을 덮친 독감으로

    28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관능적 욕망과 같은 불안정한 내면을

    격렬한 감정 표출 형태로 표현한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를 이끈 천재 화가, 에곤 실레





    "예술을 억압하는 것은 범죄다. 태어나는 생명을 죽이는 것과 같다."


    -에곤 실레-

    Egon Schiele


  • [작가정보] 장 오노레 프라고... [1]


    화려한 로코코 시대의 

    대표적인 프랑스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프랑스의 그라스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프라고나르는 일찍이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여주었고

    그의 재능은 그 당시 유명한 화가 

    프랑수아 바우처가 인정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파리로 이주하게 된 그는

    샤르댕 아틀리에에서 미술 재능을 갈고닦았으며,

    1752년, 

    황금 송아지에 바치는 여로보암의 그림으로 

    로마상을 수상하여 이탈리아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는 로마에 있는 동안 이탈리아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내었고,

    권위 있는 프랑세즈의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지만,

    지나치게 제한적인 아카데미의 한계를 깨닫고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파리로 돌아와서도 그림을 그린 프라고나르는,

    프랑스혁명으로 그의 주 수입원이었던 후원자들이 

    단두대에서 하나 둘 사라지자, 

    급격한 가난에 시달리다 사망하게 됩니다.

    혁명으로 몰락하기 직전의 

    프랑스 귀족들의 문화양식을 

    보여준 로코코 시대의 대표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필요하다면 나는 엉덩이로라도 그리겠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 Jean-Honoré Fragonard -




  • [작가정보] 레오나르도 다 빈...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변호사 아버지와 농민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혼외자식으로 그의 부모님보다, 

    숙부의 보살핌 아래에서 자연과 세상을 가르침 받았습니다.


    뒤늦게 아버지가 그의 재능을 알아차리면서

    14살에 피렌체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안토니오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그리스도의 세례>에 조수로 참여한 그는

    일반적인 템페라 기법에 유화를 같이 도입하여 

    세간에 큰 감명을 주었고 정식화가 길드인 

    성 루카 조합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1482년, 30살이 된 다 빈치는 밀라노 공국에서 

    여러 작품들을 만들어냈는데, <최후의 만찬>은  

    그중 가장 손 꼽히는 작품이었습니다.


    1499년, 루이 12세의 밀라노 침입으로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차노비 델 조콘도의 아내를 

    그린 초상화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하였고,


    모나리자의 꿈꾸는 듯한 미소는 

    완벽한 여성성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훗날 영원한 여성상의 이상적인 본보기로 꼽히게 됩니다.


    그러나 다빈치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모나리자를 

    완성하지 못하고 1519년 5월 2일, 

    자신의 저택에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화가뿐만 아니라 조각가이자, 발명가, 

    건축가, 해부학자 그리고 음악가로

    르네상스 시대를 넘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 잘 보낸 하루 끝에 행복한 잠을 청할 수 있듯이 

    한 생을 잘 산 후에는 행복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다. "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르 다 빈치

    -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


  • [작가정보] 주세페 아르침볼도


    초현실주의 화파에 영감을 준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


    이탈리아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그림의 길로 들어서게 된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 아르침볼도


    합스부르크 왕가, 페르디난트 1세는

    아르침볼도의 해박한 지식과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높이 평가해

    그를 자신의 궁정화가로 삼으며 3대를 함께하게 됩니다.


    당시 궁정 화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황제와 왕족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었습니다.

    아르침볼도 역시 그들의 초상화를 그렸지만,

    그의 그림은 다른 궁정화가들의 초상화와 많이 달랐습니다.


    계절, 원소, 직업과 관련된 사물로 구성되어

    파격적인 발상과 형태를 가진 아르침볼도의 초상화 작품들은

    수수께끼나 퍼즐, 기이한 것들이 유행하던

    16세기 르네상스 사회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막시밀리안 2세의 초상화를 사계절로 표현한

    그의 작품들을 보며 신하들은 불경하다며 분노했지만

    황제는 오히려 배를 잡고 웃었다고 하는데요.


    사계절의 그림 속 의미는

    소년-청년-장년-노년으로 표현하여 모든 시간의 흐름을,

    4원소는 지구 전체를 우리 황제께서 다스린다는 의미로

    황제를 신격화하는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기괴하지만 매우 독창적이며 현대적인 느낌마저 주는

    그의 작품은 르네상스 전성기 때와 달리 자신만의 개성적인 스타일로 표현하는

    매너리즘 양식으로 구분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혁신적인 작품은 사후에는 잊혀졌지만 

    20세기 초현실주의의 등장으로 그의 상상력이 빛을 보게 되며,

    달리와 같은 화가들에게 상상의 근원이 되어준 아르침볼도





    "어떠한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다운, 특별한 추함도 있다."


    -그레고리오 코마니니-

    Gregorio Comanini


  • [작가정보] 에두아르 마네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린 화가

    에두아르 마네

     

    에두아르 마네는 

    1832년 프랑스 파리에서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법관인 그의 아버지는 자신을 따라서 법조계에 종사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미술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때 아버지의 뜻을 담아 여러 방면으로

    관련 학교에 지원하려 했지만,

    실패를 거듭하게 된 마네는


    결국, 집안으로부터 미술교육을 인정받아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고,

    남는 시간에 루브르 박물관에서 전시된 걸작들을 

    꾸준히 모방하고 공부하였으며,



    단순히 구도와 기법을 모방하는 것이 아닌,

    그것들의 자신의 작품 속에서 새롭게 재해석 해내었습니다.


    그리고 1856년 그는 전속 화랑에서 

    힘을 빼고 표현을 간결하게 하여 중간 톤을 

    억제하는 붓 터치 스타일을 고수하였고,

    현실 속의 이야기들을 그리게 되는데


    1863년 낙선전에서는 그의 작품인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전시되면서 

    옷을 입지 않은 나체 여성과 옷을 입은 남성을 함께 그렸다는 이유로 

    비난이 빗발쳤지만


    훗날 어두운 화면에 밝음과 참신성의 표현기법을

    도입하게 되었고, 클로므 모네를 비롯한 청년 화가 모임에서 

    인상주의에 길을 여는 기연을 이루었습니다.


    19세기 현대적인 삶의 모습에 접근하여 

    시대적 화풍을 사실주의에서 인상파로 전환되는 데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에두아르 마네.



    "나는 남이 보기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것을 그린다."

    - 에두아르 마네 -

    Edouard Manet


  • [작가정보] 얀 반 에이크 [1]


    유화를 처음으로 발명한 미술가

    얀 반 에이크


    15세기 플랑드르 사실주의 미술의 토대를 만든 대표 작가이며,

    북유럽 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얀 반 에이크


    그는 전 세기의 양식에 구애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관찰하는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종교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고 하는데요.


    당시 이탈리아 미술과 확연히 다른

    얀 반 에이크만의 극도로 세밀하고 정교한 표현은

    독보적인 플랑드르 미술 양식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관중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품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그림 안에 마주 잡은 부부의 뒤편 거울 속에 비치는

    수수께끼 같은 제3의 인물은 바로


    이들을 관찰하고 있는 얀 반 에이크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관찰자인 화가의 모습을

    그림 속에 함께 담고 있는 대담하고 기발한 구성이

    작품의 혁신적인 면모로 평가받게 됩니다.


    또한 유화를 발명한 사람으로 칭송되는 얀 반 에이크.

    당시 화가들은 광물이나 식물 등에서 안료를 직접 마련하여

    그것을 주로 계란에 섞어 사용했지만,

    계란을 섞은 물감은 빨리 마르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본 그는 안료에 기름과 계란을 함께 섞어보는 등 물감 연구를 통해

    유화의 틀을 다지며 제작 기법을 확립할 수 있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유화 물감은 유럽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가

    미술의 발전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조화로운 구성과 극도로 정교한 세부 묘사, 완벽한 마감으로

    지나가버린 세계의 영원한 기록을 창조해낸

    최초의 유화 발명 미술가, 얀 반 에이크





    "1434년 얀 반 에이크가 여기 있었다"


    -얀 반 에이크-

    Jan van Eyck


  • [작가정보] 알폰스 무하 [1]


    아르누보 시대를 대표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알폰스 무하


    체코를 대표하는 애국자, 

    민족주의자 이기도 한 알폰스 무하

    체코 독립에 있어 열성적이었으며, 

    독립 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우표, 화폐 디자인을 손수 제작하기도 했다. 


    그의 노래에 대한 재능 때문에 

    브르노의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무하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사랑했다.


     1894년 Théâtre de la Renaissance에서

     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알리기 위한 석판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무하의 아름다운 포스터는 큰 호평을 받아 유명해졌다.


    그는 이때부터 많은 회화, 포스터, 광고와 책의 삽화를 그리고 보석, 카펫, 벽지등을 제작하게 되는데 

    이러한 스타일은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이후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의 아르누보 스타일은 많은 사람들이 흉내 내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이런 상업적인 성공에 대해 부담스러워 했으며 

    보다 고상하고 위엄있는 예술과 고향에 대한 예술적 관심에 집중하고 싶어했다.


    1906년 미국에 초대받아 1910년까지 

    그는 현대적 스타일로 프라하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들이었던 <임페리얼>

     그리고 자치의회 건물인 <유럽>의 인테리어 작업을 했다.

     1918년 독립된 체코 정부가 형성된 후에 무하는 

    <관제적 양식>인 체코의 기하학적 양식의 창조에 몰두했다. 

    그의 재능은 새 정부가 쓸 우표, 은행권, 문서 등을 디자인했다


    그의 인생 말엽에 무하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사라졌다. 

    1930년 체코에서 그의 작품들은 낡은 기능주의 전성시대의 산물인 구식이며 

    지나치게 민족주의를 강조한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1939년 3월 프라하가 독일에게 점령된 후에 게슈타포는 

    몇 번이나 고령에 다다른 무하를 검거해서 심문을 가했다. 

    그 결과 무하는 폐렴을 앓게 되었고 1939년 7월 14일에 사망했다.




    "예술가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과 조국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알폰스 무하-

    Alphonse Maria Muc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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